부산미술의 자발성

부산미술의 자발성을 위한 내면적 논고 (김만석)

자발성/자율성의 역사를 존중하고 배우라
―퐁피두 부산분관 유치와 부산미술의 대항적 성좌
                                  김만석

1.
오랫동안 ‘불모지’ 담론이 횡행한 적이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이 담론이 불식되었으나, 여전히 낡고 관행적인 시스템을 관리, 운영하는 ‘주체들’은 이 담론을 지렛대 삼아 부산에는 ‘문화예술’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사고하거나, ‘급’이 안 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산’을 가꾸거나 일군 문화예술적 실천들을 통해 도시를 브랜드화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항상 ‘외부’에서 세계적인 문화예술을 ‘수입’하고자 하는 까닭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부산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적 실천들을 세계적인 것으로 사고하고 활성화하기보다, ‘세계적인 것’을 들여와서 ‘세계적인 것’이 부산에 있다고 ‘외부’에 말하고자 하는 정책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수입’이라는 표현도 엄밀히 말해 적절치 않다. 오히려 ‘개발’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도시재생이나 마을만들기가 대체로 ‘개발’과 연동되어 있는 것처럼, 이번 부산광역시 행정부는 문화적으로 포장된 ‘재생’을 기반으로 ‘개발’ 사업을 ‘탄력적’으로 활용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이 과정에서 부산시민들의 에너지를 대거 흡수, 재편성해 ‘부산시민의 욕망’을 구조화해 왔으며, 부산광역시의 이런 비문화적 문화정책으로 ‘부산시민들’을 통합시키고자 함으로써, ‘출구’를 없도록 만드는 ‘전략’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구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의한다) 
 
요컨대, 세계적인 것이라는 동어반복을 부산에 들여와 문화예술이 활성화된 곳으로 ‘포장’하려는 방식은 이중화된 ‘식민주의적 기획’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불모지 담론이 조직해왔던 ‘지방’의 구조를 글로벌 차원에서의 ‘지방’의 구조로 자리바꿈하는 위계화를 구조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관행적’(제도적, 시스템적) 흐름은 ‘외부의 힘’(권력과 자본)이 부산을 황폐화하는 과정에서도, 문화예술이 자생하는 골목을 형성하고 그 외부적 힘과 다른 경로를 만들거나 분투했던 귀한 역사와 실천을 매번 다시 지워버리거나 없는 셈 치는 수순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그런 점에서 부산의 문화예술의 역사는 위계화의 구조와 이 구조를 돌파하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힘이 벌이는 각축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부산의 문화예술적 실천들의 역사와 기억, 물질적 흔적들의 역사는 여전히, 굳건하게 호흡을 하고 있다. 관행적인 시스템이 거의 ‘생각해보지 않았던 실천’을 제안하고 의제화했던 역사이자 동시대의 실천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일테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여러 가지 진통에도 불구하고 29년째 치러지고 있고 부산비엔날레가 4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열리고 있다. 특히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 8월 1일 개최되었던 <제1회 부산청년비엔날레>라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실천적인 역사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상략)
부산에선 부산청년비엔날레가 창립돼 올해 처음으로 젊은 작가들이 모여 들어 첫 전시회를 성황리에 가졌다. 이 비엔날레란 말은 2년마다란 말로 2년에 한번 전시회를 갖는다는 뜻. 
이 전시회를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부산 시내 동방미술회관, 원, 공간, 고관당, 중앙, 현대화랑 등 일곱 군데서 열렸다. 출품작가들은 만 35세 이하의 작가들 84명. 몇 사람 이름을 들어보면 이두식, 전국광, 지석철, 한만영, 강창렬, 곽남신, 김선, 김옥희, 박금숙, 김문기, 김영철, 박항률, 신일근, 윤익영, 이상조, 이완호, 정철교, 조영애, 최효순, 허황 등.
작가 선정위원 이일 씨는 팜플렛 인사말에서 “이 청년비엔날레는 순전히 부산을 무대로 현대미술과의 의욕적으로 대결하고 또 그것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비엔날레는 파리청년비엔날레의 운영방법을 따를 것도 암시하고 있다. 
(하략)

―「부산선 부산청년비엔날레 창립」, <동아일보> 1981. 8. 7.

<제1회 부산청년비엔날레>는 관도, 선배도, 선생의 도움도 없이 부산의 청년 예술가들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마련한 예술적 실천이었다. 이들은 당대 세계적인 비엔날레였던 베니스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염두에 두고, 파리에서 열렸던 청년비엔날레를 의식해, 운영과 기획을 사고하고 있었다. 1976년 제1회로 끝난 <서울비엔날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레퍼런스로 국제적인 비엔날레를 통해 ‘부산 청년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좌표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기획은 당대 부산의 제도적 미술 인프라와 단체를 청년비엔날레의 기획 아래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일테면 “선배들이 호응하고 격려해주는 편보다는 오히려 반대하는 쪽이 많았”(「젊은視覺 아쉬워」, <부산일보> 1981. 8. 8)음에도 청년 예술가들의 기획은 점점 외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자리잡는다. 3회 운영위원 구성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운영위원에 ‘선배’ 세대를 두고, ‘실행위원’에 당대 활동하던 젊은 작가들이 맡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젊은 예술가들이 선배세대와 기성의 단체, 제도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청년비엔날레가 부산미술 공동체 전체의 ‘프로젝트’가 되도록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역전 현상의 ‘기획’이야말로 ‘부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수 있다. “○‥‥부산청년비엔날레운영위원회는 제3회(85년)부산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 및 진행위원을 다음과 같이 선임했다(가나다순). ▲운영위원=金대륜 金응기 金인환 金정명 金해성 朴태석 李태호 許종하 ▲진행위원=姜현근 金덕길 朴은주 宋주섭 安병옥 유성철 예유근 정광화 정진윤 정철교 洪순명.” 「청년비엔날레 운영위 구성」, <부산일보> 1984. 5. 19.
 
<부산청년비엔날레>가 개최되었던 시기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평가받는 ‘사인화랑’의 개관과 운영”이 “김응기, 정진윤, 예유근, 박은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인화랑’ 멤버였던 정진윤은 이후 “부산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장”과 “미술계의 담론을 형성하는 ‘부산미술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부산 미술의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회로를 모색하는 회로를 제공했다.(「개척자의 길을 돌아보다」, <국제신문> 2012. 2. 7) ‘사인화랑’은 1984년 전두환 정부의 유화정책에 발 빠르게 대응해 조형언어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실천과 경험을 마련했던 셈이다. 냉전의 장벽 아래에서 외부와의 연결을 끝없이 모색한 중요한 기획이었고 사인화랑의 실천은 2000년대 이후 부산의 ‘대안공간’/‘신생공간’의 흐름의 역사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달리 말해, 부산미술의 한 경향은 ‘제도’와 ‘인프라’를 ‘예술가들이 설득’함으로써 겨우 새로운 문화예술적 형식이 갖추어지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예술이 도시브랜드의 중추가 되기 시작한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안공간과 관이 일종의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지탱해왔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부산의 문화예술가들의 의견이야말로 국제적이거나 글로벌한 가치체계를 담지하는 것일 수 있으며, 행정 주도의 ‘문화예술 정책’이란 문화예술가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식민화’를 반복할 가능성만 농후해질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검은 머리 외국인이 ‘로컬’ 자산을 수탈하듯이, 부산의 ‘풍경’과 ‘역사’, ‘문화예술’을 ‘삭제’하고 ‘퐁피두 부산 분관’을 ‘조물주’로 사고하게 만들 게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민선 8기가 출범한 이후 부산은 두 가지 이슈로 시민들의 욕망을 구조화해 통합하고자 했으나 대대적인 실패로 끝났거나 대책 마련이 안 된 채로 지지부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메가 이벤트’로 추진되던 ‘등록 엑스포’는 일찌감치 대표결에서 진다는 ‘보도’(2022년 6월)가 나왔음에도 막연한 ‘기대’에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 허사를 반복했다. 정부 당국에서 사우디에 밀린다는 평가가 나왔으나, ‘역전’할 수 있다는 ‘근자감’만을 반복하며 막대한 국내 홍보

궁극적으로 투표 이후 전국민적인 우스갯거리이자 전세계적인 ‘우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을 부산시민들의 ‘열패감’, ‘낭패감’은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메가이벤트에 도전하고 실패할 수는 있지만, 부산시와 정부 당국이 벌인 ‘홍보’ 예산 증액의 과정은 시민들을 블록버스터급의 ‘스펙터클 판타지’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후과’를 남긴 사건이 되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예컨대, 등록 엑스포를 ‘부산 대개조’와 같은 수사적 표현에 연결하고 ‘61조’와 같은 신기루 ‘자본’에 거의 삼 년여 동안이나 노출시키면서, 대책 없이 ‘미래’를 앞당겨 써버린 결과는 단순히 도전에 실패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부산에서의 삶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회의하게 되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버렸다. 달리 말해, 모든 부산의 대규모 현안을 등록 엑스포와 연결했다가, 그 어느 것도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한 현재적인 상황은 ‘출구’가 없는지도 모른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55보급창 이전, 트램 설치, 부산형급행열차, 북항 재개발, 대심도 고속화도로는 물론이고 청년 이탈의 가속화, 노령인구의 증가, 지역 대학과의 상생에서부터 공공기관 유치와 기업유치에 관련된 해묵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나 이 ‘모오든’ 것을 ‘등록 엑스포’에 연루시킴으로써, 각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고 해도 폐허가 되어버린 ‘느낌’(affect)을 주고 만 것이다(이런 대규모 정책들을 통합하면서, 이번 부산시정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던 15분 도시론은 실종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러한 메가 이벤트적 스펙터클 판타지 정책의 출구는 똑같은 프로세스를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러니까, 또다른 스펙터클 판타지에 해당하는 ‘정책’을 내 놓는 것만을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훨씬 복잡하고 힘겨운 현안들을 뒤덮어 버릴 스펙터클 판타지는 그에 값할 정도로 무조건 대규모적이고 글로벌한 상징을 담보한 것이어야만 했을 터이다. 마치 드라마 <미생>에서 큰 계약을 따낸 ‘과장’이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보이는 ‘회사 업무’가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는 데 부족하다고 착각해 비리를 저지르고 감사에 걸린 ‘에피소드’처럼, ‘거대한 판타지’를 ‘리얼’하게 ‘경험’(홍보)해버린 이후에 더 이상 ‘리얼한 현안’으로 되돌아오지 못해 스펙터클 미로에 갇혀 버린 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산 시민들은 그 거대한 스펙터클 판타지에서 일찌감치 깨어났음에도 ‘정책’ 수준에서는 여전히 ‘헤매는’ 중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 시도 의회도 마찬가지. 수렁에 빠진 건 부산시민이 아니다.
최근 백양터널 ‘유료화’ 지속을 예고했다가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시당국’이 이를 철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로관리 등의 예산과 재원 마련이라는 말로 핑계를 댔으나, 그런 문제라면 최소 1,000억의 건축비와 125억의 1년 운영비(×2년)가 필요한 퐁피두 분관 전용관을 밀실 행정과 합의로 처리하려던 ‘관행’도 그만두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기업이 주체가 된 ‘서울’ 모델을 차용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발휘하면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부산엔 오랫동안 ‘먹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익’을 서울로 환수해 간 기업이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자리에 떡 하니 자리하고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바로 그러하다.
즉, 롯데타워 건립을 차일피일 미뤄온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이제서야 ‘타워’ 건설을 하는둥 마는둥 미적거리고 있으니, 롯데타워 내부에 퐁피두 분관을 마련하도록 ‘설득’하는 행정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부산시장이 등록 엑스포를 위해 신동빈에게 위원장 자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이력도 있고, 또 그간 부산시민들을 ‘가스라이팅’ 하다시피 ‘랜드마크’ 건립을 약속하면서 설계를 변경했던 롯데의 저열한 이력을 보건대, 퐁피두 분관을 롯데타워에 설치하도록 요구하는 정도는 적어도 롯데나 퐁피두 상호적으로 아무런 실도 없는 것이고, 부산시도 혈세와 인력을 낭비하지 않는 방책일 수

있지 않겠는가! 몰운대에는 석양의 채색만으로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엑스로 유치를 위해 내걸었던 ‘탄소저감’을 위한 협약 등에 대해서도 몽땅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싶겠지만, 내뱉은 말들이 모두 사라질 수는 없다. 후보자 시절 “다대포해수욕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가졌다. 요즘은 해운대나 기장을 많이 관광들 하는데, 다대포를 새로운 명소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불법사찰 몰랐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부산일보> 2021. 2. 23)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개발’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근대적인 발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석양’을, ‘다대포’를, ‘몰운대’ 자체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구상하는 게 더 요긴한 시점이다. 쓸데없이 부동산 지가만 상승시키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혹은 자연경관의 접근성이 지가를 상승토록 만들던가!

3.   
이기대를 말하는 것에 앞서 몰운대를 보자. 몰운대는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에 지본담채로 14폭 가운데 「몰운대」로 그려진 바 있다. 김윤겸이 1770년(영조 46년)에 그린 것으로 영남 일대를 기행하고 그린 산수화첩에 몰운대가 들어가 있다. 현재 이 작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2017년 3월 8일 보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예술적으로 중요하다. 현 시장이 오래 재직해왔던 대학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몰운대 자체는 일찌감치 예술적 (재)생산이 이루어진 ‘장소’였고 이를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후속세대의 예술적 지속성과 등가의 가치를 지닌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101812263514953
 
 몰운대 자체도 1972년 6월 26일 지정기념물 제27호로 등록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개인 사유지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몰운대의 ‘자연 경관’은 부산 사람들에게도, 외지 사람들에게도 예술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사랑받았다. 부동산으로 가치를 전환하기보다는 공적 장소로 영구적으로 묶어두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모른다. 김윤겸의 화첩보다 앞서 동래부사를 지냈던 이춘원(1571~1634)의 한시가 몰운대를 먼저 예찬한 바 있다. 

浩蕩風濤千萬里(호탕한 바람과 파도가 천만리 이어지는데)
白雲天半沒孤台(하늘가 몰운대는 흰 구름에 묻혔네.)
扶桑曉日車輪赤(새벽 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이니)
常見仙人駕鶴來(언제나 신선이 학을 타고 오는구나.)
―이춘원(*시와 번역은 몰운대에 설치된 시비에서 인용)

이춘원의 한시 이외에도 30~40편에 이르는 한시가 남아 있고, 직접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정약용과 신흠과 같은 걸출한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에도 몰운대가 나타난다.
https://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0046
 현대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몰운대 시’를, ‘소설’을 문학적 성취로 남기고 있다. 
 
몰운대의 저녁을 보지 않고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마라
멀리 태백산 피재에서 시작된
한 방울의 물이 낙동강을 만들어
길고 긴 물길 남해로 흘러갈 때
강의 팔짱을 끼고 부창부수 함께 흘러온
우리 산줄기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부산 남자처럼 작별을 하는 몰운대
강이 흘리는 이별의 눈물이 뜨거워져
구름이 안개로 부서지며 쓰러지고
산은 마침표처럼 침묵하며 바라볼 뿐인데
웅녀(熊女) 같은 땅의 강과
환웅(桓雄) 같은 하늘의 산이 나누는
아득한 별사를 읽지 못하고는, 감히
가벼운 세 치 혀로 사랑 타령은 하지 마라
몰운대 저녁노을이 다대포를 덮을 때
강과 산의 작별을 가슴 치며 바라보다
바다가 먼저 붉게 울어, 하늘의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사랑 때문에 울어 본 적 있었냐고
그런 어둔 눈으로 내게 묻지도 마라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경승지며, 370km 낙동정맥 산줄기의 끝자락.
―정일근, 「몰운대 저녁노을」,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9.

몰운대는 낙동강과 산맥과 바다가 합쳐지는 자연적 통합의 장소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몰운대가 자연의 순환이, 또 사랑과 이별이 겹쳐 있는 장소이자 역사와 신화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서 ‘#몰운대’로 나타나는 상당한 이미지 ‘건수’는 생애사적 순간들과 몰운대의 자연경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일 터이다. 몰운대라는 자연경관만으로도, 계절과 상관없이 몰운대가 부산시민과 외부자들에 의해 ‘이미지’로 기록되고 등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자신들의 삶일 몰운대에 포개진다는 의미이다. 어떤 스펙터클 판타지의 개입이나 도움 없이도 말이다. 심지어 조선시대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래왔을 터이다. 
‘이기대’도 마찬가지다(몰운대보다 이기대 이미지가 몇 배는 더 많다). 이기대는 동남해안에 자리잡고 있어, 몰운대와는 다른 호방한 풍경과 신비한 오륙도 경관은 여전히 명물로 손색이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기대를, 또한 지척의 오륙도를 그리고 읊조리고 노래해왔음은 당연하다. 1990년대 후발부터 이루어진 용호동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했으나 이기대 자연경관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만큼 이기대 풍경은 부산 내외부의 사람들에게 ‘신체화된’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이기대에 퐁피두 부산분관을 두고자 하는 시도는 등록 엑스포 구상과 연결되어 남구와 일으킨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협상으로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생색내기이자 성과라는 두 가지 토끼 사냥용으로 말이다(몰운대를 장황하게 쓴 건, 이기대 대신에 선택될지 모르는 다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광역도시의 문화예술 정책이 어떠해야 한다는 정답 같은 게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잘 되는 도시들이 있는 것을 ‘활용’하고 ‘이행’해 가치를 창안하고 활성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면, 또 파리의 퐁피두 센터가 그런 경로를 걸어왔다면, 부산의 문화예술 정책도 부산의 문화예술을 더욱 적극적으로 ‘창안’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창작과 연구가 저 건설비용만큼 투여된다면, 굳이 퐁피두 부산분관을 들여와야 할 까닭이 없고 거기에 ‘목’을 매달아야 할 필요는 결코 없다. 더구나 불필요한 ‘오해’를 부산시 당국이 낳지 않으려면, 토지매입 비용과 건축비용, 연간 운영비용을 문화예술기금으로 전환해 ‘부산’에서 예술문화가 더 풍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물리적인 축적이 아니라 ‘컨텐츠’가 중핵이라면, 쌓아두기만 하고 전혀 써먹지 못한, 헤아릴 수 없는 부산의 역사적, 문화예술적 자산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리어 <모모스커피>가 부산의 1세대 서양화 작가인 ‘김종식’의 <귀환동포>(1947)를 사용해 제품 브랜딩(<부산>)으로 활용하거나, 덕화명란이 여성작가인 ‘오소영’의 <문명>(2024)을 통해 부산과 바다의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수산회사로서의 브랜딩을 하고자 하는 것은 부산시와는 달리, 이 작업 기업들이 콘텐츠로 자신들의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는 반증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정책은 근시안적인 물리적 건설에 목매는 일보다 이미 있었거나 열심히 자신의 문화예술적 실천에 분투하는 예술가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하는 게 좋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1981년의 <부산청년비엔날레>와 <사인화랑>의 활동이 한국에서도 유래없는 문화예술적 실천이었고, 그것이 시도되었을 때 관의 도움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다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때의 고군분투가 ‘역사’가 되었다면, 이제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시행착오를 지금,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가 전혀 없다. 파리를 (위계적으로가 아니라) ‘상대화’하면서 레퍼런스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당시의 청년작가들의 기조와 또 세계사적 미술의 흐름에서도 새로운 흐름이었던 ‘대안적 예술공간’을 자발적으로 생성, 운영, 활성화했던 이력을 폐기처분하지 않기 위해선, 퐁피두 부산분관을 ‘시’가 주체가 되어 유치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적어도 분명하다. 
퐁피두 부산분관 유치가 부산이 스스로 일구어온 가치들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면,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또 다시 맨바닥에서 얼굴을 짓찧으며, 상처입고, 고통받으며 시작해야 하는 순환과 반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슬픈 회로를 후속세대에게 강제하지 않으려면, 부산시 문화정책 당국이 각도와 방향을 달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지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글로컬 시대에 여전히 부산을 ‘지방화’하려는 정책 당국의 헛다리 짚기가 수정되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이 이런 와중에도 당국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창안하겠지만, 그럴수록 부산이 황폐화될까가 염려되고 두려울 따름이다. 저열한 위기담론에 휩쓸려서 말이다. 

이제, 제발 ‘현안’으로 돌아오기를, 부산의 예술가들이 분투하면서 만들어온 역사적 오솔길에서 문화정책의 아이디어를 부디 얻기를.